[BL] 지저귐 (1)

폐루 1 10,809
태초에 누가 작은 씨앗을 뿌려 그것이 자라고 자라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애초에 이야기나 지어낸 것을 좋아하던 인간들은 옹기종기 길 한가운데 모여 옛날 이야기와 말로 심심함을 달랬고, 생명은 어디에서나 싹트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즈음 이었다. 보통 인간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 보내지면 두려움으로 몸을 서리기도 하지만, 그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넋을 놓아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기곤 했다.

  생명이 태어나고 다시 죽을 때 까지 소요되는 그 많은 시간이 다 어디로 사라지랴. 백은은 정말 귀찮다는 표정으로 연신 말을 되풀이했다. '백은.' 그는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신으로서 동시에 죽음을 슬퍼하는 신이기도 했다. 매번 태어나는 인간의 아이는 작고 귀여우며 웃음을 만들어내는 신비한 능력이 있지만, 그 작은 몸은 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만큼 작고 여린 몸이었다.
  백은은 우는 아이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지만 백은은 고개를 저으며 살며시 아이를 안아들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여기서 더 손을 댈 수 없는 몸이란다."

  백은은 힘겹게 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죽음을 맞는 아이는 죽기싫다는 듯 더 세게 목소리를 높여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에 맞춰 백은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얼굴을 찌푸려 한껏 괴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백은은 그 작은 아이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어느새 색색 거리는 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자 그는 그제서야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의 아비도 어미도 내가 다시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만 말아다오."

  작은 빛이 일렁이는 공간에 아이를 밀어넣자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아마 그에게 주는 작은 벌이겠지만 그는 개의치않았다. 본래 백은은 누군가를 위해 힘을 쓰는 일은 하지 않지만 자신의 사명이 달린 일이라면 누구보다 더 폭발적인 힘을 쓸 수 있는 그런 자 였다. 백은은 곧 꺼져갈 듯 위태로운 것을 보면 한없이 잡아주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백은이 관리하는 이 커다란 숲은 보통의 인간이 절대 볼 수 없는 곳이지만 태어나기 직전의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광경의 숲이었다. 하지만 태어나고나면 언제 봤냐던 듯이 금새 망각해버리기도 쉬운 숲.
  백은은 본래의 아름다운 이름을 잃어버리고 망각의 숲이라고 이름 붙여진 자신의 숲을 누구보다 아끼는 존재였다. 아까처럼 태어나는 모든 것이라면 관리하고 숨을 불어넣는 그런 존재.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곳도 사라지게 될거야."

  백은은 숲 중에서 가장 큰 나무에 걸터앉아 구경하고 있던 죽음의 신에게 말했다. 그 둘은 파트너 이면서도 서로에게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본래 생명과 죽음이라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인데, 다른 신들은 그 둘을 끔찍히 싫어하고 동시에 무서워했다. 마음만 먹으면 잡귀들을 끌고 자신의 영역을 차지할 수 있는 죽음의 신이나, 땅을 밟으면 그의 영역이라는걸 표시라도 해주 듯 자라나는 생명이 그저 껄끄러울 뿐 이었다.

  "괜찮아. 인간세계의 시간으로는 엄청 긴 시간이잖아. 그보다 넌 아직까지도 많은 생명을 피워내고 있으니까. 너 아까 표정 정말 가관이었는데, 정말 담아두고 싶을 정도의 얼굴이었어."

  "요즘 부드럽게 넘어가주니까 그렇게 나오지?"

  백은은 그의 얼굴을 후려치며 나무밑으로 내동댕이 쳤다. 곧이어 너무하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다시 올라오는 죽음의 신 이었지만, 백은은 똑같이 인상을 쓰면서 낮게 욕지기를 퍼부었다. 그는 내뱉던 욕을 멈추고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며 걱정어린 눈빛을 지어보였다. 죽음의 신 역시 점점 메말라 가는 백은의 숲을 걱정했지만, 신에게 완전한 죽음이란 것은 없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방금전 내보냈던 아이도 실로 오랜만에 싹튼 여린 생명이었기에 평소 같았으면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을,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아아, 짜증나. 너랑 있으려면 내 몸이 다 쑤셔. 여긴 너무 쓸데없이 밝아."

  "그럼 네 땅처럼 칙칙하고 어둡고 그 잡귀많은 곳에 싹을 심으리?"

  "입이 더 험해졌네."

  죽음의 신을 툴툴 대며 한바퀴 재주를 넘었다. 넘자마자 큰 굉음과 함께 불어온 바람이 그를 감쌌고, 그는 새까만 새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백은은 메말라 떨어져버린 잎을 보며 거의 울상을 지었지만 아직 다 떨어지지 않은 잎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의 파트너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곧 제 땅으로 돌아갔지만 백은은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곧 메마른 땅에 새싹을 심었다.  이 작은 것이 다시 자라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애초에 신에게 절망과 희망이라는게 있던가, 그는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조금씩 고개를 들어보이던 싹마저 고개를 숙여버리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 아직 살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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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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